to tell the truth
Brand · 브랜드 · 소비자심리 — No.25-bang-olufsen-irony

닿지 않는 완벽함

완벽한 디자인일수록 브랜드는 오히려 소비자와 멀어진다
이 글이 답하는 질문
  • 뱅앤올룹슨은 왜 존경받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하는가?
  • Beoplay 같은 서브 브랜드는 세련됨의 함정을 실제로 해결하는가?
  • 세련됨과 접근성이라는 딜레마를 에르메스는 어떻게 다르게 풀었는가?
이런 분께프리미엄·명품 브랜드의 확장을 고민하는 브랜드 담당자

존경은 살수록 쌓이지만, 애정은 다가가야 생긴다. 뱅앤올룹슨은 이 둘을 함께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브랜드다.

세련됨의 함정은 브랜드가 더 잘 만들수록 소비자와 멀어지는 역설을 가리킨다. 이 역설이 가장 선명하게 응축된 사례가 있다. 덴마크의 뱅앤올룹슨(Bang & Olufsen)은 오디오·비디오 업계에서 미적 완성도의 동의어로 통한다. 소재의 선택, 표면 처리, 비율, 손끝에 닿는 감각까지 — 제품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 정교하게 다듬어진 결과물이다. 1970년대부터 이 브랜드는 기술과 미학을 한 몸으로 묶어내는 것으로 업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지켜왔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이 브랜드의 제품을 디자인 소장품으로 들여놓은 것도 그래서다. 뱅앤올룹슨의 스피커는 전자기기이기 전에, 디자인사의 한 페이지다.

그런데 이 브랜드의 매장에 들어가는 일은 뜻밖에 어렵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세련됐지만 낯설다. 진열된 제품 앞에서 손을 뻗다가 거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걸 사는 사람들은 따로 있겠지"라는 생각이 구매욕보다 먼저 온다. 명시적으로 누군가를 밀어낸 적은 없다. 그런데도 문턱은 실재한다. 미적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그 완성도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함께 늘어난다.

이 반응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 그런 브랜드를 하나쯤 안다. 매체에서 접하면 감탄하고, 매장 앞을 지나며 눈으로는 오래 머무르지만, 문을 밀고 들어가지는 않는 브랜드. 나쁜 제품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만들어서다. 잘 만들어진 것 앞에서 사람은 종종 스스로를 검열한다. "내가 이걸 가질 자격이 있나." 이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그 브랜드는 이미 고려 대상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지난 편에서 이 시리즈는 소비자가 브랜드 안에 자신을 투영할 자리 — '초대의 틈'을 남기지 못할 때 세련됨이 오히려 관계를 막는다고 짚었다. 뱅앤올룹슨은 그 원리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사례다. 이 브랜드는 어느 한 요소에서 틈을 남기지 않았다. 소재도, 마감도, 비율도, 심지어 매장의 조도까지 빈틈없이 계산됐다. 그 결과 완성도는 업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지만, 소비자가 자신의 부족함이나 서투름을 얹을 자리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완벽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완벽함이 남긴 여백의 크기가 문제였다.

뱅앤올룹슨은 왜 존경받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할까

Why Is Bang & Olufsen Admired but Not Loved?

여기서 드러나는 건 하나의 어긋남이다. 뱅앤올룹슨은 존경받는다. 업계는 이 브랜드의 미적 탁월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존경이 애정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는다. 브랜드가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사려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우러러보는 마음과, 곁에 두고 싶은 마음. 세련됨이 극단까지 밀어붙여지면 앞의 것만 남고 뒤의 것이 빠진다. 존경-애정 격차라 불러도 좋을 간극이다.

이 간극은 막연한 인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사용의 층위에서도 드러난다. 뱅앤올룹슨의 리모컨은 아름답다는 평가를 오래 받아왔지만, 동시에 직관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그만큼 오래 따라다녔다. 미적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사용성의 일부가 뒤로 밀린 흔적이다. "아름다운 예술품이지만 쓰기는 어렵다"는 평판이, 아름답다는 평판보다 소비자의 기억에 더 오래 남았다.

이 리모컨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불편함의 사례가 아니라 존경-애정 격차가 겉으로 새어 나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사용성은 소비자가 브랜드와 매일 마주치는 지점이다. 진열장 안의 완벽함은 가끔 감탄하고 지나가면 되지만, 손에 쥔 리모컨의 불편함은 매일 반복된다. 존경은 가끔 마주쳐도 유지되지만, 애정은 매일의 마찰을 견뎌야 유지된다. 뱅앤올룹슨의 리모컨은 그 매일의 마찰 지점에서, 아름다움이 실용을 이기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브랜드가 품질에서 타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다. 타협하지 않은 것 자체가 함정이 됐다. 더 좋게 만들수록 더 멀어지는 역설. 뱅앤올룹슨이 미적 완성도를 낮췄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완성도를 더 많은 사람이 다가설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했어야 했다는 뜻이다. 아름다움과 접근성은 원래 반대말이 아니다. 다만 세련됨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순간부터, 둘은 반비례하는 것처럼 굴기 시작한다.

이 어긋남이 특히 뼈아픈 이유가 있다. 존경은 브랜드가 원해서 쌓은 것이다. 소재를 고르고, 표면을 다듬고, 리모컨의 버튼 하나까지 몇 년씩 매만진 결과다. 애정은 다르다. 애정은 소비자가 스스로 다가와야만 생긴다. 브랜드가 아무리 정교해도, 소비자의 발걸음까지 대신 옮겨줄 수는 없다. 뱅앤올룹슨은 존경을 만드는 법은 완벽하게 익혔지만, 애정을 초대하는 법은 다른 문제로 남겨뒀다. 두 능력은 같은 근육이 아니다.

존경은 거리를 두고, 애정은 거리를 좁힌다.
Admiration keeps its distance. Affection closes it.

이 격차는 오디오·비디오 업계만의 사정이 아니다. 디자인을 정체성의 핵심에 둔 브랜드라면 어디서든 비슷한 그림자가 진다. 완성도를 자랑삼아 내세울수록, 그 완성도의 크기만큼 "나와는 다른 세계"라는 인식도 함께 자란다. 브랜드가 스스로 세워 올린 벽이, 정작 브랜드가 가장 필요로 하는 넓은 소비자층 앞을 막아서는 것이다. 뱅앤올룹슨의 사례가 특별한 이유는 이 구조가 유난히 순도 높게 드러나기 때문일 뿐, 원리 자체는 낯설지 않다.

Beoplay라는 처방

The Beoplay prescription

뱅앤올룹슨도 이 간극을 모르지 않았다. 이 브랜드가 내놓은 답은 서브 브랜드였다. 'B&O Play'로 시작해 지금은 'Beoplay'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은 라인이다. 더 젊은 소비자층을 겨냥했고, 가격을 낮췄고, 디자인도 손이 더 쉽게 닿는 쪽으로 옮겼다. 무선 헤드폰, 이어폰, 소형 스피커가 이 라인의 주력이었다. 원래 브랜드가 가진 세련됨은 유지하면서, 문턱만 낮추려는 시도였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Beoplay 제품들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프리미엄 오디오 시장에서 애플과 소니 사이 어딘가에 자기 자리를 만들었다. 문턱을 낮추겠다는 목표만 놓고 보면 이 라인은 제 몫을 했다. 애플만큼 대중적이지도, 소니만큼 저렴하지도 않은 그 중간 지점 — 세련됨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으면서 손이 닿는 자리를 새로 만든 것이다.

'절반의 성공'이라는 표현 자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절반인 이유는, 접근성은 가격과 디자인을 낮추는 방식으로 얻어졌을 뿐, 존경-애정 격차를 좁히는 다른 방법 — 이를테면 본진의 제품 자체에 사람의 이야기를 붙이는 방법 — 은 시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접근성을 얻은 대가로 다른 자리에서 새 문제가 생겼다. 이 라인이 커질수록, 원래의 뱅앤올룹슨이 가졌던 '절대적으로 세련된' 지위가 함께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따라붙은 것이다. 젊은 층에게 다가가려는 발걸음이, 오리지널 브랜드가 오래 지켜온 자리를 조금씩 넓혀버린 셈이다. 서브 브랜드를 만든 이유가 정체성 희석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서브 브랜드의 성공이 다시 정체성 희석의 우려를 낳는다. 딜레마를 풀려던 시도가 같은 모양의 딜레마를 하나 더 만든 것이다.

겉으로는 순조로운 확장이었지만, 안으로는 조심스러운 줄타기였다는 뜻이다. 이름이 겪은 변화도 이 불안을 그대로 보여준다. 'B&O Play'는 처음부터 모브랜드의 이름을 안고 시작했다. 그런데 이 라인은 이후 'Beoplay'로 다시 태어난다. 원래 이름에서 한 걸음 더 떨어진 이름이다. 완전히 새 이름을 짓지도 않았고,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쓰지도 않았다. 이 어중간한 자리가, 이 브랜드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크기를 정확히 보여준다. 너무 가까우면 본진의 지위가 흔들리고, 너무 멀면 애초에 서브 브랜드를 만든 이유 — 본진의 세련됨을 나눠 쓰는 것 — 가 사라진다. 이름 하나에도 그 줄다리기가 새겨져 있다.

나누는 것은 푸는 것이 아니다

Dividing is not solving

서브 브랜드는 언뜻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인다. 세련됨은 그대로 두고, 접근성이 필요한 자리에 새 이름 하나를 더 세우는 것. 조직 입장에서는 깔끔한 해법으로 보인다. 예산도, 담당 조직도, 커뮤니케이션 전략도 깨끗하게 나뉜다. 회의실에서 이 방식이 매력적인 이유도 여기 있다. "본진의 정체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문장 하나로 반대 의견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식이 실제로 하는 일은, 딜레마를 푸는 게 아니라 딜레마를 둘로 나누는 것에 가깝다. 세련됨은 본진에 남기고, 애정은 곁가지에 맡긴다. 두 문제가 사라진 게 아니라, 두 개의 이름으로 각자 존재하게 됐을 뿐이다.

같은 딜레마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룬 사례가 있다. 에르메스(Hermès)다. 이 브랜드의 제품 역시 세련됨의 극점에 있다. 버킨 백 하나에 수십 시간의 장인 작업이 들어간다. 가격도, 희소성도, 완성도도 최고 수준이다. 에르메스라고 이 격차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완벽하게 재단된 가죽과 손끝의 스티치는, 뱅앤올룹슨의 표면 처리만큼이나 감히 만져보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에르메스는 그 세련됨 옆에 낮은 가격의 서브 라인을 세우는 대신, 세련됨 그 자체에 이야기를 붙이는 쪽을 택했다. 장인의 이름을 공개하고,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기술을 익혔는지, 한 제품에 그 기술이 어떻게 담기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결과물의 세련됨은 손대지 않은 채, 그 뒤에 사람의 서사를 얹었다. 가방은 여전히 차갑게 완벽하다. 그러나 그 가방을 만든 장인의 이름과 손의 습관을 알게 되는 순간, 소비자는 완제품이 아니라 그 뒤에 있던 시간을 산다는 감각을 갖는다. 사는 것의 의미가 바뀌면, 거리를 느끼던 자리에 다른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두 접근의 차이는 작지 않다. 나누는 방식은 세련됨이 감당하지 못한 몫을 다른 이름에 떠넘긴다. 그 이름이 자라날수록 원래 이름의 지위는 함께 옅어질 위험을 안는다. 이야기를 붙이는 방식은 세련됨의 크기를 그대로 둔 채, 그 안에 사람이 들어설 틈을 만든다. 완성된 제품은 여전히 차가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과 시간이 곁에 붙는 순간, 소비자는 거기에 자신의 상상을 얹을 자리를 얻는다. 세련됨을 한 치도 낮추지 않고도 거리를 좁히는 길이다.

이 차이를 조직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서브 브랜드는 '누구에게 팔 것인가'를 나누는 결정이다. 서사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더하는 결정이다. 전자는 결국 시장을 쪼개는 일이고, 후자는 하나의 시장 안에서 관계의 층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다. 쪼개진 시장은 관리가 쉬워 보이지만, 브랜드 전체로 보면 정체성이 두 갈래로 흩어진다. 관계의 층을 더하는 쪽은 손이 더 가지만, 브랜드는 하나로 남는다.

물론 서브 브랜드 전략이 늘 틀린 답은 아니다. 카테고리와 브랜드의 역사에 따라 유효한 선택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택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지금 딜레마를 풀고 있는가, 아니면 두 개의 브랜드로 나눠 각자 안고 가기로 한 것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지 못하면, 서브 브랜드는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이름을 바꾼 것에 그친다.

이 방식의 위험은 양쪽 모두에서 온다. 서브 브랜드가 실패하면, 접근성을 넓히려던 시도 자체가 무산되고 본진의 세련됨만 남는다. 반대로 서브 브랜드가 크게 성공하면, 그 성공이 본진의 정체성을 잠식한다는 불안이 뒤따른다. 실패해도 문제, 성공해도 문제라면, 애초에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자리만 옮긴 것이라는 뜻이다. 진짜 해법이라면 성공이 새로운 불안을 낳지 않아야 한다. 딜레마가 진짜로 풀렸는지 가늠하는 가장 정직한 기준은, 그 해법이 잘 작동할 때조차 새로운 불안이 따라붙지 않는가다.

뱅앤올룹슨이 세련됨의 함정에 빠진 것은 미적 완성도가 지나치게 높아서가 아니다. 그 완성도가 소비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방향으로 과도하게 추구됐기 때문이다. Beoplay는 그 방향을 바로잡으려던 시도였지만, 문제를 나누는 방식으로 접근한 탓에 원래 이름이 짊어진 무게는 그대로 남았다. 에르메스가 보여준 건 다른 가능성이다. 완성도를 지키면서도 거리를 좁히는 길은,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여는 데 있다는 것.

그러니 지금 프리미엄 확장을 고민하는 브랜드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새 이름을 만들 것인가, 우리 이름 안에 문을 낼 것인가." 새 이름은 빠르고 명료하지만, 본진의 무게는 고스란히 남긴다. 문을 내는 일은 느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세련됨 그 자체를 덜어내지 않고도 거리를 좁힌다. 뱅앤올룹슨의 아이러니는 결국 이 선택의 문제였다. 얼마나 세련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세련됨 곁에 어떤 종류의 문을 세울 것인가.

새 이름을 만드는 쪽이 언제나 게으른 선택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이 편해 보이는 이유가 딜레마를 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딜레마를 조직도 위의 다른 칸으로 옮겼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택하는 것과, 모른 채 택하는 것은 다르다. 알고 택하면 두 이름 사이의 거리를 계속 관리할 수 있다. 모르고 택하면, 서브 브랜드가 커질 때마다 본진이 흔들리는 이유를 매번 새로 찾아 헤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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