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자리

- 앰네스티 '이상한' 재판 캠페인은 왜 참여자를 판사로 세웠나?
- 사람은 왜 남이 내린 결론보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더 쉽게 움직이는가?
-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은 참여형 캠페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 인터랙티브 영상 캠페인은 어떻게 기획되어야 하는가?
- 참여형 캠페인이 참여 이후에 놓치기 쉬운 것은 무엇인가?
결론을 들은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결론을 내린 사람은 움직인다. '이상한' 재판에서 우리가 설계한 건 메시지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판결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사람을 움직인 건 논리가 아니라 더 나은 판사,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후위기 캠페인에는 익숙한 문법이 있다. 녹아내리는 빙하, 떠다니는 북극곰, 가파르게 치솟는 그래프. 그리고 마지막에 붙는 한 줄.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미 그 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7월 23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100일 앞둔 날,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기후변화와 인권 캠페인인'이상한 재판'을 공개했다. 이 캠페인을 준비하며 가장 오래 붙들었던 질문은 무엇을 말할까가 아니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어떻게 다시, 그리고 제대로 듣게 만들까였다. 정보는 충분했다. 기후위기라는 결론을 들어본 사람은 많았다. 그런데 그 결론을 스스로 내려본 사람은 드물었다.
알고 있는 것과 믿고 있는 것은 다르다. 기후위기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알고 있는 것'의 칸에 들어 있었다. 뉴스로 듣고, 캠페인으로 보고, 고개를 끄덕인 결론. 그 결론은 정확하지만 가볍다. 내가 내린 결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캠페인이 한 번 더 같은 결론을 말해 줘 봐야, 그 칸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석을 치웠다. 대신 판사석을 하나 놓았다. 첫 화면의 문장은 이랬다. "아래 시작하기 버튼을 누르면 당신은 이 재판의 판사가 됩니다."
왜 하필 재판이었나
재판은 결론을 뒤로 미루는 형식이다. 광고는 첫 컷에서 결론을 말하지만, 재판은 판결문이 나오기 전까지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증언이 있고, 증거가 있고, 이의제기가 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뒤에야 누군가 판결을 내린다. 우리가 빌리고 싶었던 건 이 '유보'의 구조였다. 결론이 유보되어 있어야 사람은 끝까지 듣는다.
참여형 캠페인의 형식은 재판 말고도 많았다. 퀴즈도 있고, 서명도 있고, 테스트도 있다. 하지만 퀴즈에는 이미 정답이 있고, 서명에는 이미 결론이 있다. 참여자는 정해진 답을 맞히거나 정해진 문장에 이름을 보탤 뿐이다. 재판은 달랐다. 재판에서 판사는 답을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답을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가 찾던 건 '참여'가 아니라 '판단'을 요구하는 형식이었다.
사건은 세 개였다. 공들여 지은 사과 농사를 이상 저온으로 망친 농부. 뒷동산 산불을 두 번 목격한 뒤 집이 타버릴까 두려워하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 폭우 속에서 젖은 마스크로 숨을 몰아쉬며 배송하는 택배 노동자. 셋 모두 해외 기후소송과 국내 사례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픽션이었다. 북극곰은 없었다. 빙하도 없었다. 대신 이웃이 있었다. 기후위기를 먼 곳의 풍경이 아니라 옆집의 사정으로 옮겨 오는 것, 그게 사건 선정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세 원고의 요구는 모두 조금씩 '이상'했다. 손해배상금 1,000원. 내 두려움을 정부가 막아 달라는 청구. 비 오는 날 배송을 멈추게 해 달라는 요청. 캠페인 이름의 작은따옴표는 여기서 나왔다. 이상한 요구는 멈칫하게 만든다. "1,000원을 왜?"라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 사람은 이미 사건 안으로 한 발 들어와 있다.
이상한 건 요구만이 아니었다. 원고의 입을 빌려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상 기후가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로만 취급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농부의 1,000원은 보상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 책임이 개인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는 걸 법의 언어로 확인받고 싶다는 청구. 이상한 재판은 결국 이상한 기후를,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습관을 겨눈 제목이었다.
사람은 왜 남의 결론에 설득되지 않는가
설득 메시지에는 역설이 있다. 결론이 선명할수록 듣는 사람은 방어한다. "행동하세요"라는 문장은 옳지만, 그 옳음이 오히려 벽을 세운다. 누군가 내 대신 결론을 내려 주면, 그 결론은 끝까지 남의 것으로 남는다.
사람을 가장 깊이 바꾸는 건 남의 논증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논증이라는 것. 사람은 스스로 입장을 정한 뒤에는 그 입장과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려 한다. 특히 그 결정이 능동적이고, 수고가 들었고, 기록으로 남았을 때 더 그렇다.
그런데 자기설득을 실제로 굴리는 엔진은 논리보다 욕망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판사석에 앉은 사람은 옳은 판결을 계산하기 전에, 먼저 좋은 판사이고 싶어 한다. 억울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사람, 증거 앞에서 공정한 사람, 약한 쪽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선함은 바깥에서 부과되는 의무이기 이전에, 사람이 스스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선함도 욕망이다.
행동경제학에는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진단 효용(diagnostic utility)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을 관찰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낸다. 판결은 사건에 대한 결론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증거가 된다. "지급한다"를 고르는 순간, 판사는 농부의 손을 들어 주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이런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의 변화는 그 자기 확인의 순간에 일어난다.
나는 이 캠페인을 통해 발견한 원리에 이름을 하나 붙여보았다. 판사석 설계(Judge's Seat Design). 결론을 말해 주는 대신, 사람이 결론을 내릴 자리를 설계하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판결을 통해 더 나은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자리를 설계하는 일이다. 메시지를 더 세게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위치를 바꾸는 것. 관객에서 판사로.
위치가 바뀌면 같은 정보도 다르게 읽힌다. 관객에게 IPCC 보고서는 '또 나온 무서운 숫자'다. 판사에게 같은 보고서는 '판결에 필요한 증거'다. 관객은 정보를 소비하고, 판사는 정보를 검토한다. 우리가 캠페인에 넣은 증거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새로웠던 건 그 증거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자리였다.
판사석 설계에서 가장 경계한 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었다. 원고의 증언에 비장한 음악을 깔고, 판사에게 눈물의 사연을 들이미는 순간, 판사석은 다시 관객석으로 돌아간다. 감정으로 몰아붙인 판결은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연출의 판결이다. 그래서 증언은 담담하게, 증거는 건조하게 두었다. 판단의 몫을 판사에게 온전히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전해 들은 결론보다, 스스로 내린 판결에 더 오래 묶인다.People are rarely moved by a verdict they only heard. They are bound by the one they signed.
판사석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판사석은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판사입니다"라고 말해 놓고 영상만 틀어 주면, 그건 여전히 관객석이다. 판사가 판사처럼 느끼려면 실제로 판단해야 할 순간이 반복적으로 와야 한다. 그래서 재판을 배우가 연기하는 실사 영상으로 만들되, 곳곳에서 영상을 멈췄다. 그리고 판사가 고른 선택에 따라 다음 변론이 달라지게 했다. 내 판단이 법정의 흐름을 바꾼다는 감각이 있어야, 판사석은 비로소 진짜 자리가 된다.
증언이 끝나면 화면이 멈추고 판사의 속마음을 고르게 했다. 농부의 증언 뒤에는 "원인은 몰라도 피해 사실은 분명해 보이는군"과 "모든 해가 풍년일 수는 없지. 원고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닐까?" 사이에서. 검사가 "이의 있습니다!"를 외치면, 판사는 이의제기를 기각할지, 변호인에게 주의를 줄지 직접 정해야 했다. 판단에 필요하면 증거보기를 눌러 농업재해 피해면적 추이, 산불 통계, IPCC 보고서, 독일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판결문이었다. 주문(主文)의 빈칸에 "지급한다"와 "지급하지 않는다" 중 하나를 골라 판결문을 완성하게 했다. 판결선고 날짜에는 참여한 그날의 날짜가 찍혔다. 사소한 장치지만 나는 이 날짜를 좋아했다. 허구의 재판이지만, 판결은 오늘 내가 내린 것이 된다.
인터랙티브 영상은 늘 욕심나는 장르였지만, 동시에 늘 위험한 장르였다. 선택이 장식이 되는 순간 영상은 그저 끊기는 영상이 된다. 이 캠페인에서 선택은 장식이 아니라 역할이어야 했다. 판사에게 선택지는 기능이 아니라 직무다. 그 차이를 붙드는 게 설계의 전부였다.
세 사건은 판사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판단을 요구하도록 짰다. 농부의 사건은 손해의 사건이다. 피해는 숫자로 분명하고, 물음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다. 초등학생의 사건은 두려움의 사건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피해를 권리 침해로 볼 수 있느냐는,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택배 노동자의 사건은 노동의 사건이다. 개인이 조심하면 될 일인지, 제도가 멈춰 세워야 할 일인지를 묻는다. 어느 사건을 고르든, 판사는 기후위기의 다른 얼굴 하나와 마주 앉게 된다.
틀린 판결도 허락한 이유
선택지를 쓰며 가장 많이 흔들린 지점은 '틀린 답'을 넣을지였다. 캠페인의 목적을 생각하면, 판사가 원고 편에 서도록 선택지를 한쪽으로만 열어 두는 편이 안전했다. 하지만 정답만 있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고를 수 없는 판사는 판사가 아니라 낭독자다.
그래서 원고를 의심하는 선택지를 남겼다. "원고가 업무 중간 휴식을 취하면서 건강을 챙겼어야 해." "화재에 대한 두려움은 원고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까?" 이건 우리가 지어낸 악역의 대사가 아니다. 기후위기 이야기를 들을 때 많은 사람이 실제로 속으로 떠올리는 생각이다. 그 생각을 캠페인이 먼저 꺼내 놓고, 판사가 직접 고를 수 있게 했다.
의심해 볼 자유가 있어야 믿음이 자기 것이 된다. 원고를 의심해 본 판사가 증거를 확인하고, 그다음 증언을 듣고, 결국 "지급한다"를 고른다면 그 판결은 누구의 설득도 아닌 그 사람의 결론이다. 처음부터 정답을 쥐여 준 판결보다 훨씬 무겁다. 판결문에 "지급하지 않는다"를 남겨 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선함의 욕망은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작동한다. 다른 길이 열려 있을 때만, 그 길을 고르지 않은 것이 나에 대한 증거가 된다. 원고 탓을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판사, 외면할 수 있었는데 끝까지 들은 판사. 더 나은 내가 되려면 더 못한 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먼저 있어야 한다. 선택권 자체가 보상이라는 신경과학 연구(Leotti & Delgado, 2011)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스스로 골랐다는 감각이 있어야 선함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으로 느껴진다.
이 결정에는 캠페인 너머의 이유도 있었다. 판사가 원고를 의심하는 순간은, 사실 기후위기를 둘러싼 사회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개인이 조심했어야지." "원래 날씨는 해마다 다르잖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캠페인 밖으로 밀어내면, 캠페인은 이미 동의한 사람끼리의 박수가 된다. 판사석은 그 사람들까지 앉을 수 있는 자리여야 했다. 설득해야 할 사람은 늘 의심하는 쪽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정답만 있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의심해 볼 자유가 있어야 믿음이 자기 것이 된다.A choice with only one answer isn't a choice. Belief becomes yours only when doubt was allowed.
판결 뒤에 도착하는 현실
판결문을 제출하면 화면이 바뀐다. "이 재판은 허구이지만, 기후위기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세 사건 각각에 겹쳐지는 실제 사건이 나타난다. 2021년 2월, 프랑스 파리행정법원이 정부의 기후위기 책임을 인정하며 청구된 1유로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사건. 2020년 9월, 포르투갈의 아동·청소년 6명이 유럽 33개국을 상대로 낸 기후소송. 같은 해 12월, 옥외노동자와 농민 등 시민 40여 명이 국가인권위원회에 낸 기후위기 진정.
이 반전의 순서가 중요했다. 현실을 먼저 보여 주고 판단을 요구했다면, 사람들은 그 판결을 '뉴스에 대한 의견'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판결을 먼저 내리게 하고 현실을 나중에 보여 주면, 현실은 '내 판결을 확인해 주는 사건'이 된다. 파리의 1유로 판결은 더 이상 먼 나라 법원의 소식이 아니라, 방금 내가 내린 판결과 같은 결론이 된다.
허구는 연습장이고, 현실은 채점표다. 판사석에서 먼저 결론을 내려 본 사람만이, 현실의 판결을 자기 일처럼 읽는다. 1,000원이라는 이상한 숫자가 1유로라는 실제 숫자와 겹치는 순간, 캠페인의 설계는 비로소 한 바퀴를 돈다.
초등학생 원고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제가 90살까지 산다면 2100년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아이의 증언을 들으며 판결을 고민한 판사는, 뒤이어 포르투갈 청소년들이 유럽 33개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는 사실을 만난다. 방금까지 '이상한 청구'로 보였던 두려움이, 이미 현실의 법정에 올라 있는 청구였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상했던 건 요구가 아니라, 그 요구를 이상하게 여기던 나의 감각이었다는 깨달음이 그 자리에서 온다.
1만 명의 판사는 어떤 판결을 내렸나
재판정에는 1만 명이 넘는 판사가 앉았다. 이듬해 한 매체 보도에 따르면, 온라인 모의재판에 참여한 1만여 명 가운데 70%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에 대해 "정부에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앰네스티 캠페인팀은 이 캠페인이 기후위기가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람의 잘못이 빚은 결과라는 점을 알리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나는 이 숫자에서 70%만큼이나 나머지 30%가 반갑다. 10명 중 3명은 다른 판결을 내렸다. 원고를 의심하는 선택지가 장식이 아니었다는 뜻이고, 판사석이 정말로 열려 있었다는 증거다. 모두가 같은 답을 고르는 재판이었다면 그 100%는 판결이 아니라 정답률이었을 것이다. 다른 길을 고른 사람이 있었기에, 정부의 책임을 물은 70%의 판결은 각자가 스스로 고른 결론이 된다.
그리고 그 70%는 캠페인이 '말해 준' 결론이 아니다. 1만 명이 증언을 듣고, 증거를 넘겨 보고, 저마다 판결문에 서명한 결과다. 더 나은 판사이고 싶었던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 올린 숫자. 캠페인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메시지는, 결국 참여자들이 스스로 만든 이 숫자였다.
1만 명의 판사 중 7명꼴이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그 결론은 누구도 대신 내려 주지 않았다.Seven in ten of 10,000 judges held the government responsible. No one handed them that verdict.
이 판사석이 다 하지 못한 것
지금 돌아보면 아쉬움은 선명하다. 첫째는 선택지의 기울기다. 30%의 다른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솔직히 말해 매 장면 두 선택지의 무게는 같지 않았다. 한쪽은 합리적인 판사의 목소리였고, 다른 쪽은 피해자를 탓하는 목소리였다. 판사는 고를 수 있었지만, 무엇을 골라야 할지는 이미 보였다. 답이 너무 뻔하면 그 선택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누구나 고를 답을 고른 판사는 더 나은 자신을 확인한 게 아니라 정답을 맞혔을 뿐이다. 기후 대응의 비용, 일자리, 에너지 가격처럼 양쪽 모두 일리 있는 진짜 딜레마를 선택지에 올렸다면, 판결은 더 무겁고 더 오래 남았을 것이다.
둘째는 검사다. 검사의 이의제기는 대부분 "증거가 없다"는 한 가지 논리에 머물렀고, 변호인은 매번 증거로 그것을 반박했다. 반론이 약하면 판결도 가벼워진다. 이기기 쉬운 재판은 판사를 오래 붙들지 못한다. 판사석을 진짜로 만들고 싶었다면, 검사에게도 판사를 흔들 만한 대사를 줬어야 했다.
셋째는 판결 이후다. 판결문을 제출한 판사에게 우리가 건넨 다음 역할은 '이메일 구독자'였다. 기후와 인권 이야기를 쉽게 풀어 보내 주겠다는 제안은 성실했지만, 방금 판사석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는 작은 자리였다. 공정한 판사였던 나는 판결문 제출과 함께 사라지고, 구독자라는 익명의 이름만 남았다. 한 번의 판결로 선함의 장부가 닫혀 버린 셈이다. 더 나은 나를 확인한 사람에게는, 그 나를 계속 이어 갈 이름과 역할이 필요했다. 자기설득이 가장 뜨거운 순간은 판결 직후다. 그 열기가 식기 전에 판결을 그대로 이어 갈 행동, 예컨대 내가 내린 판결문을 그대로 탄원이 되게 하는 장치가 있었다면 판사석과 행동 사이의 거리는 훨씬 짧아졌을 것이다.
다행히 판사석은 캠페인 기간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2023년, 앰네스티는 이 사이트를 기후정의 교육의 도입 자료로 다시 내놓았다. 학교 수업과 동아리에서 함께 판결해 보고, 사례를 바탕으로 판사·변호사·검사·원고 역할을 나눠 대면 모의재판으로 응용하라는 안내와 함께였다. 혼자 앉던 판사석이 교실의 토론 테이블이 된 셈이다. 우리가 캠페인 안에서 다 설계하지 못한 '판결 이후의 자리'를, 판사석이라는 형식이 스스로 찾아간 것처럼 보였다.
넷째는 길이다. 사건 하나에도 여러 번의 증언과 선택, 증거 확인이 이어진다. 끝까지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판결의 순간이 오지만, 중간에 일어선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영상에 배속 버튼을 둔 건 이 고민의 흔적이었다. 판사석의 무게와 참여의 문턱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관계였고, 그 사이의 균형을 끝까지 다 찾지는 못했다.
결정하는 순간은 설계할 수 있는가
이 캠페인이 내게 남긴 가장 큰 배움은 이것이다. 캠페인은 결론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결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설계하는 일일 수 있다. 사람의 결정을 대신 내려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결정하게 되는 자리는 만들 수 있다. 그 자리의 높이, 그 앞에 놓인 증거, 그 뒤에 도착할 현실까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건 죄책감이 아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당신도 책임이 있다"는 말은 사람을 방어하게 만든다. "당신은 어떤 판결을 내리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사람을 앞으로 기울게 한다. 앞의 것은 선함을 요구하고, 뒤의 것은 선함을 욕망할 기회를 준다. 이상한 재판이 한 일은 후자였다.
이 원리는 기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비영리 캠페인이 다루는 대부분의 주제가 그렇다. 빈곤, 차별, 난민, 아동 보호.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이상 결론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주제일수록 필요한 건 더 강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을 내릴 자리다. 판사석은 법정의 모양일 필요도 없다. 질문 하나, 선택 하나, 자기 이름이 적히는 문장 하나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그 순간 결정의 주어가 누구냐다.
기후위기는 여전히 다 아는 이야기다. 그래서 더 이상 결론을 말해 주는 캠페인으로는 부족하다. 필요한 건 사람들을 다시 판사석에 앉히는 일이다. 증거를 보여 주고, 반론을 들려주고, 그리고 조용히 펜을 건네는 일. 그 펜으로 사람들은 사건의 결론을 쓰는 동시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쓴다.
Every verdict is also a verdict on the judge. Give people the bench, and they'll choose to be b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