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tell the truth
함정들 · 14 / 15

필연이라는 착각

운을 실력으로 착각하면 다음 판단은 반드시 어긋난다
이 글이 답하는 질문
  • 운과 실력을 구별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 생존자 편향과 결과 편향은 어떻게 다른가
  • 성공한 사람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 하면 왜 실패하는가
  • 판단의 질을 결과와 분리해서 평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분께성과를 평가하고 다음 전략을 세워야 하는 마케터·리더

운을 필연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다음 판단을 그르친다. 운과 실력을 가르는 눈이, 좋은 의사결정의 시작이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아주 적절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행복한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해보자.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대부분의 사람은 '우연'이라는 말보다 '운명'이라는 말을 고른다. 사람의 힘을 넘어선 어떤 필연적인 에너지가 이 결말을 준비해두었을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놀랍도록 빠르게 성공한 어느 스타트업의 창업자 이야기도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미디어와 대중은 성공의 원인을 찾아 나선다. 창업자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 경험이 어떤 성격을 빚었는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의 기억까지 동원해 '될성부른 떡잎'의 증거를 모으고 점과 점을 잇는다. 그런데 이 창업자 개인이 회사의 급성장에 실제로 기여한 몫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클까.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이미 결말을 먼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는 이미 행복한 결혼으로 끝났고, 창업 이야기는 이미 성공으로 끝났다. 결말을 알고 나서 과거를 되짚으면, 그 결말로 이어지는 길만 또렷하게 보인다. 두 사람이 그날 만나지 못했다면 벌어졌을 무수한 다른 삶, 창업자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갈렸을 무수한 다른 회사들은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일어난 하나의 경로만 보면서, 그 경로가 마치 유일하게 가능했던 경로였던 것처럼 착각한다. 불확실했던 그 순간의 확률은 잊히고, 결과의 확실함만 남는다.

이야기하는 인간

Homo Fictus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인간에게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즉 이야기하는 인간이라 불릴 만한 본능이 있다. 정보에 공백이 생기면 그냥 두지 못하고 이야기로 메우려는 본능이다. 여러 개의 분절된 사건 앞에서 인간은 자동으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부여하고, 비어 있는 틈을 서사로 채운다. 그래야 세상이 이해 가능한 곳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본능이 실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자주 오해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세상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복잡도로 실시간 작동하는 곳이다. 어떤 사건을 촉발한 방아쇠(trigger)와 그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었던 조건(condition), 그로부터 이어지는 인과의 전체 경로를 온전히 복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복잡한 경로를 몇 개의 점으로 요약하고, 그 요약을 원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두 가지 오류가 태어난다. 실제로는 관계없는 두 사건을 관계있는 것으로 여기는 상관관계의 오해, 그리고 진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인과관계의 오해다. 둘 다 위험한 건 지금 이 순간의 착각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잘못된 인과를 다음 판단의 근거로 저장해두고, 비슷한 상황이 오면 같은 결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결과가 재현될 가능성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낮다. 한 번 통했다는 사실은, 다음에도 통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 오해에 이름을 붙여두자. **운의 소급 편집(retroactive editing of luck)** — 결과를 이미 안 상태에서 과거로 거슬러 원인을 짜 맞추는 습관이다. 편집은 언제나 결말을 향해 일어난다. 그래서 편집된 과거는 실제 과거보다 훨씬 깔끔하고, 훨씬 그럴듯하다.

운을 필연으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재현되지 않을 결과를 다시 기대하게 된다.
Mistaking luck for destiny sets us up to expect an outcome that will not repeat.

빨간 속옷과 승리는 어떤 관계인가

이 심리적 오해가 얼마나 사소한 일에까지 파고드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반드시 빨간색 속옷을 입는다는 어느 스포츠 선수의 징크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속옷의 색이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칠 리 없다. 그런데도 그 선수에게 속옷 색은 진지한 문제로 느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경기에서 한 번 승리했을 때, 그 선수의 머릿속은 '무엇이 이 승리에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질문으로 가득 찬다. 원인을 찾고 싶은 간절함이 클수록, 아무리 비논리적인 상관관계라도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진다. 속옷 색이든, 신발을 신는 순서든, 좋은 결과와 조금이라도 시간상 붙어 있던 요소는 모두 후보가 된다. 그리고 한 번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그 이야기는 다음 경기에서 다시 검증하기보다 그냥 지키고 싶은 규칙이 된다. 불확실성 앞에서 통제감을 되찾으려는 이 본능은 이해할 만하지만, 통제감을 준다는 사실과 실제로 결과를 통제한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다.

조직도 이 개인의 징크스와 크게 다르지 않게 움직인다. 어느 해 우연히 성과가 좋았던 팀의 회의 방식, 보고 양식, 심지어 사무실 자리 배치까지 '그 성공을 만든 요인'으로 지목되어 다른 팀에 그대로 이식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정작 그 성과에 진짜 기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분리해서 검증하지 않은 채로다. 개인의 빨간 속옷이 조직 차원에서는 '우리만의 성공 공식'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된다. 형태는 다르지만 구조는 똑같다 — 우연히 붙어 있던 요소를 원인으로 승격시키는 것.

왜 성공 신화는 실제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성공한 사람의 서사는 이 본능이 가장 화려하게 작동하는 무대다. 창업자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 요인을 회고할 때, 그 회고는 대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원인을 거슬러 찾다 보면, 실제로는 무수히 많았을 우연한 갈림길 중 결과로 이어진 길만 눈에 들어온다. 나머지 길, 같은 판단을 내렸지만 실패로 끝난 무수한 다른 사례들은 애초에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흔한 왜곡에는 이미 이름이 붙어 있다.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이다. 우리는 살아남은 사례만 보고 그 공통점을 성공의 비결이라 부르지만, 실패한 사례들도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이 왜곡은 경영서에서도 반복해서 지적돼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기업'의 사례집들이 몇 년 뒤 재검증됐을 때, 그중 상당수 기업이 이미 흔들리거나 무너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책이 틀렸다기보다, 책이 포착한 공통점이 애초에 성공의 원인이 아니라 그저 그 시기의 흔한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실패한 기업들도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을 수 있지만, 실패한 기업은 애초에 사례집에 실리지 않는다.

미디어의 인터뷰 구조도 이 착각을 거든다. 기자는 창업자에게 "무엇이 성공의 비결이었나요"라고 묻고, 창업자는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사실 상당 부분은 운이었습니다"라는 답은 기사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창업자도, 기자도, 독자도 함께 그럴듯한 인과를 완성하는 데 협력한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답보다, 이야기가 되는 답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뿐이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다음 세대의 창업자들에게 '성공 공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그 공식을 그대로 따라 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실패한다.

결과 편향, 좋은 결과가 나쁜 판단을 덮어버릴 때

이 착각에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결과 편향(outcome bias)이다. 판단의 질이 아니라 판단이 낳은 결과만 보고 그 판단을 평가하는 경향이다. 결과가 좋으면 그 판단은 소급해서 훌륭한 판단이 되고, 결과가 나쁘면 아무리 근거가 탄탄했던 판단이라도 소급해서 무모한 판단이 된다.

마케팅 회의실에서 이 편향은 특히 자주 일어난다. 한 팀이 근거도 빈약하고 예산 배분도 무리했던 캠페인을 밀어붙였는데, 공교롭게 그 시점에 경쟁사가 큰 논란에 휘말리면서 반사이익으로 매출이 치솟았다고 해보자. 다음 분기 보고서에는 이 캠페인이 '과감한 베팅이 통했다'는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 팀은 다음 캠페인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예산을 무리하게 태운다. 근거 없는 베팅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을, 반복 가능한 전략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른 팀이 데이터를 촘촘히 검토하고 리스크를 줄인 신중한 캠페인을 준비했는데, 예상 못 한 외부 변수 — 이를테면 관련 없는 산업 전체의 일시적 침체 — 로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해보자. 이 캠페인은 '소극적이라 실패했다'는 딱지가 붙고, 그 팀의 신중한 판단 방식 자체가 다음 회의에서 힘을 잃는다. 두 팀 모두, 결과가 아니라 판단의 과정을 기준으로 평가받았다면 정반대의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결과는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가 아니다. 결과는 그저 결과다.
A good outcome is not proof of a good decision. It is only an outcome.

결과 편향이 무서운 이유는 조직의 학습 방향 자체를 뒤집는다는 데 있다. 좋은 판단 습관을 가진 사람이 나쁜 운을 만나 문책당하고, 나쁜 판단 습관을 가진 사람이 좋은 운을 만나 승진한다. 이 패턴이 몇 번만 반복돼도 조직 전체가 '운 좋은 무모함'을 학습하기 시작한다.

이 착각은 연속된 성공 앞에서 특히 강해진다. 우연히 두세 번 연이어 좋은 결과를 내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지금 감이 좋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주변도 그 흐름을 실력의 상승으로 읽는다. 그러나 동전을 열 번 던져 앞면이 세 번 연속 나오는 일은 그 자체로 드문 일이 아니다. 무작위한 과정에도 우연한 연속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문제는 그 연속을 목격한 인간이 무작위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에 반드시 원인을 붙이려 한다는 점이다. 이야기 본능은 성공의 순간에도, 실패의 순간에도 똑같이 작동한다.

운과 실력을 어떻게 가를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서사 본능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출발점은 운의 영역과 실력의 영역을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일이다.

실력의 영역은 같은 조건에서 반복했을 때 비슷한 결과가 재현되는 영역이다. 정확한 데이터를 읽는 능력, 고객의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실행 속도를 관리하는 능력은 대체로 이 영역에 속한다. 운의 영역은 정반대다. 같은 조건에서 반복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영역, 통제할 수 없는 타이밍과 경쟁자의 실수와 시장의 우연한 흐름이 결과를 좌우하는 영역이다. 문제는 하나의 성공이 두 영역의 결과를 뒤섞어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후적으로는 이 둘을 정확히 나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실질적인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이 결과의 원인이 무엇이었나"가 아니라 "이 판단은 같은 조건에서 반복해도 다시 옳았을 것인가"다. 전자는 이미 일어난 결과에서 거꾸로 이야기를 짜는 질문이고, 후자는 판단 자체의 품질을 결과와 분리해서 묻는 질문이다.

실무에서 이 질문을 살아있게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 **판단의 순간을 기록한다.** 결과를 알기 전, 결정하는 그 시점에 '이 판단이 옳을 확률을 얼마로 보는가'와 '그 근거는 무엇인가'를 짧게 적어둔다. 기억은 결과를 알고 난 뒤 그 결과에 맞춰 각색되지만, 기록은 각색되지 않는다.
  • **결정 전에 실패를 미리 상상한다.** '이 판단이 반년 뒤 실패로 끝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미리 물어본다. 답이 쉽게 나온다면 그 판단은 운에 기댄 부분이 큰 것이고, 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실력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실패의 경로를 먼저 그려보는 이 절차는, 사후에 성공의 이야기를 짜 맞추는 습관과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를 의심하는 습관

운을 이용하는 삶과 운에 이용당하는 삶의 차이는 여기서 갈린다. 운에 이용당하는 삶은 우연한 결과 하나를 필연의 증거로 삼고, 그 증거 위에 다음 판단을 쌓는다. 재현되지 않을 공식을 재현 가능한 공식이라 믿고 반복하다가, 운이 따르지 않는 순간 그 믿음 전체가 무너진다. 반대로 운을 이용하는 삶은 결과가 좋았을 때조차 그 결과에서 운이 차지한 몫을 따로 떼어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을 습관으로 만든다.

이 구분은 겸손을 위한 수사가 아니다.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운이 차지한 몫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성공했을 때 과도하게 확신하지 않고, 실패했을 때 과도하게 위축되지 않는다. 판단의 품질과 결과의 크기를 분리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구분에 서툰 사람이나 조직은 운이 좋았던 시기의 판단 방식을 실력으로 착각해 그대로 밀어붙이다가, 운이 바뀌는 순간 왜 무너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이 습관에는 어떤 신비로운 재능도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반복하는 끈기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확신은 반복 가능한 원리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한 번의 우연이 준 착시인가. 이야기가 완성되고 싶어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이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처음의 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정말 운명이었는지, 그 창업자가 정말 타고난 천재였는지는 끝내 확인할 수 없다.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운을 이용하는 삶의 첫 조건이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확인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다음 판단을 이야기에게 맡기게 된다. 반대로 그 확인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같은 성공 앞에서도 조금 더 겸손하게 다음 판단을 준비한다.

Luck writes the headline. Skill writes the rest of the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