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tell the truth
Brand · 일관성 · 브랜드전략 — No.31-blackberry-blockbuster

내 잣대의 함정

블랙베리와 블록버스터는 위협을 몰랐던 게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잘못 쟀다
이 글이 답하는 질문
  • 블랙베리는 왜 아이폰의 위협을 알아보지 못했는가?
  • 블록버스터는 왜 넷플릭스 인수 제안을 거절했는가?
  • 갭은 왜 로고를 6일 만에 되돌렸고,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잘나가는 브랜드가 새로운 경쟁자를 못 알아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분께새로운 경쟁자·새로운 카테고리를 지금 판단해야 하는 브랜드·전략 담당자

위협은 못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다. 익숙한 잣대로 재다가, 놓친다.

블랙베리도 블록버스터도 정보가 부족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시장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잘못 읽었다. 이유는 무지가 아니다. 기준이었다. 오래 써온 잣대로 상대를 쟀고, 그 잣대 안에서 상대는 매번 부족해 보였다. 이 오독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일관성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조용히 판단력을 잠식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일관성의 함정이 특히 교묘해지는 지점이 여기다. 브랜드가 스스로 정한 기준 — 배터리 수명, 키보드, 매장 경험, 반납 속도 — 을 오래 지킬수록, 그 기준은 판단의 도구에서 세상을 보는 유일한 렌즈로 굳는다. 렌즈 밖에서 오는 것은 렌즈에 잡히지 않는다.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르게 생긴 것을 알아볼 도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는 대개, 지난 성공을 만들어 준 바로 그 기준이다.

이 함정은 특정 시대, 특정 소비자층과 강하게 결합했던 브랜드일수록 깊어진다. 그 결합이 한때 가장 큰 강점이었기 때문이다. 그 강점을 만든 방식 —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 무엇으로 승부할지 — 이 당시에는 완벽하게 옳았다. 그리고 그 성공의 경험이 "이 방식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확신으로 굳는다. 세상이 바뀌어도 확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간격에서 다음 위협이 자란다.

이 흐름은 낯설지 않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패션 브랜드들이 2010년대에 '할머니 브랜드'로 불리게 되는 경우도 같은 구조다. 브랜드가 변한 게 아니다. 브랜드가 변하지 않는 동안, 그 브랜드를 사랑했던 세대가 다음 세대로 넘어갔을 뿐이다. 일관성이 낡음으로 바뀌는 이 순간, 브랜드 내부에는 대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확신만 남는다. 우리가 이제부터 볼 세 사례 — 블랙베리, 블록버스터, 갭 — 은 이 같은 구조가 각기 다른 얼굴로 완성된 경우들이다.

"배터리가 얼마나 가겠어요"

The ruler that was right, and wrong

2000년대 블랙베리는 비즈니스 스마트폰의 표준이었다. 'CrackBerry'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중독성 있는 제품이었고, 미국 정치인과 금융계 임원, 기업 경영자들의 필수품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블랙베리를 놓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물리적 쿼티 키보드, 강력한 이메일 기능, 보안성 — 이 세 가지가 블랙베리의 핵심이었고, 일관되게 지켜졌다.

2007년 아이폰이 나왔을 때, 블랙베리 CEO 마이크 라자리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애플이 풀 터치스크린 스마트폰을 만들었는데, 배터리가 얼마나 가겠어요. 이메일을 어떻게 치겠어요.
— 마이크 라자리디스, 블랙베리 CEO (2007)

이 발언은 무지에서 나온 게 아니다. 블랙베리의 기준에서는 정확한 관찰이었다. 초기 아이폰의 배터리 수명은 실제로 블랙베리보다 짧았다. 터치스크린 키보드로 이메일을 치는 속도도 물리적 키보드보다 느렸다. 배터리와 이메일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재면, 아이폰은 열등한 제품이었다. 라자리디스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틀린 것을 재고 있었다.

소비자가 원하게 된 것은 이메일을 더 빨리 치는 게 아니었다. 손안에서 인터넷을 탐색하고, 앱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소셜 미디어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블랙베리의 강점이던 물리적 키보드는 오히려 제약이 됐다. 화면의 절반을 키보드가 차지하면, 그 위에서 펼칠 수 있는 앱 경험 자체가 좁아진다. 블랙베리는 자신의 기준을 지키는 동안, 그 기준 자체가 더 이상 소비자의 기준이 아니게 됐다는 것을 충분히 빠르게 알아채지 못했다. 2016년 블랙베리는 자체 스마트폰 하드웨어 생산을 중단했다. 한때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절반에 가까운 점유율을 가졌던 브랜드의 종말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라자리디스의 판단력이 아니라 판단의 재료다. 그는 아이폰을 성실하게 검토했다. 데이터도 있었다. 배터리 시간을 쟀고, 타이핑 속도를 비교했다. 절차상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제는 무엇을 재는 게 옳은 항목인지를 다시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터리와 이메일 생산성은 블랙베리를 만든 기준이었지, 다음 시대의 소비자가 스마트폰에 요구할 기준은 아니었다. 유능한 판단이 틀린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것 — 블랙베리가 남긴 교훈은 이것이다.

왜 넷플릭스는 위협으로 안 보였을까

Why the real threat looked harmless

블랙베리가 익숙한 기준으로 상대를 잘못 잰 경우라면, 블록버스터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경우다. 재는 기준 자체가 아니라, 재는 대상이 아예 다른 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카테고리가 재정의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기존 카테고리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일관성은 새로운 카테고리 안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비디오 대여 시장의 선두주자였던 블록버스터는 "좋은 비디오 매장이 되는 것"에 일관되게 집중했다. 더 많은 타이틀, 더 나은 매장 경험, 더 빠른 반납. 그런데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조용히 다른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디오 매장에서의 대여 경험'이 아니라 '집에서 원하는 콘텐츠를 보는 것'.

넷플릭스가 처음 DVD 우편 대여를 시작했을 때, 블록버스터는 이것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블록버스터의 관점에서 넷플릭스는 비디오 매장의 개선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장도, 진열대도, 즉시 대여도 없는 서비스는 그들의 잣대로 재면 그냥 불편한 대안이었다.

2000년,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가 블록버스터에 넷플릭스를 5천만 달러에 인수하라고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블록버스터 경영진은 거절했다. 비디오 대여 사업의 관점에서 넷플릭스의 가치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록버스터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0년대 초반, 블록버스터도 온라인 대여 서비스를 직접 시작할 기회를 가졌다. 문제는 실행력이 아니라 관점이었다. 무엇을 만들든 그것을 여전히 '비디오 매장의 연장'으로 설계했다.

일관성의 함정은 새로운 것의 가치를 언제나 기존 카테고리의 자로 재게 만든다. 그 자로 재는 한, 새로운 것은 항상 열등해 보인다. 새로운 것이 다른 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옛 칸의 잣대로는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데면, 다시는 안 바꾼다

Gap, 6일 만의 후퇴

앞의 두 사례가 '상대를 내 기준으로 재다가 놓친' 경우라면, 갭(Gap)은 다른 경로로 같은 함정에 빠졌다. 2010년, 미국 의류 브랜드 갭은 26년 만에 로고를 바꿨다. 고전적인 세리프 폰트에서 현대적인 헬베티카로, 우측 상단에 작은 파란색 사각형을 더했다.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비판이 집중됐고, 갭은 6일 만에 원래 로고로 돌아갔다. 역사상 가장 빠른 리브랜딩 철회 중 하나로 남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경험 이후 갭은 변화를 시도하기 더 어려운 조직이 됐다. "우리는 한 번 바꾸려다 크게 혼났다"는 기억이 이후의 모든 변화 제안에 대한 내부 저항으로 굳었다. 오래 일관성을 지켜온 조직에서는 변화를 제안하는 것 자체가 조직 문화에 어긋나는 일이 되기 쉬운데, 갭은 6일의 소동을 거치며 그 성향이 한층 강해졌을 것이다. 방향을 바꾸자는 제안은 "이 브랜드를 모르는 소리"로, 새로운 시도는 "우리는 그렇게 하는 브랜드가 아니다"라는 반박으로 되돌아오는 조직. 이런 조직에서는 변화를 주장하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남는 것은 기존 방향에 이미 동의하는 사람들뿐이다. 조직 전체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더는 흔들지 않는 쪽'으로 선택적으로 재편된다.

그런데 갭의 진짜 문제는 로고가 아니었다. 브랜드의 방향, 타깃 소비자, 제품 전략이 빠르게 변하는 패션 시장에서 뒤처지고 있었다는 것 — 그것이 진짜 문제였다. 로고 실패의 소동이 그 진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일관성의 함정을 오히려 더 깊게 만들었다. 갭은 이후에도 매출 부진과 브랜드 관련성 하락을 지속적으로 겪었다. 실패한 것은 사각형 하나였는데, 조직이 배운 교훈은 "바꾸지 말자"는 훨씬 큰 결론이었다.

앞의 두 사례에서는 기준이 밖을 향해 오작동했다. 상대를 잘못 쟀다. 갭에서는 기준이 안을 향해 오작동했다. 실패의 기억이 다음 판단 자체를 가렸다. 방향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정작 봐야 할 것 — 시장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 — 을 못 봤다. 한 번의 실패가 다음 판단의 기준이 될 때, 그 브랜드는 시장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보고 결정을 내리기 시작한다.

세 가지 다른 길, 같은 출발점

Different routes, same origin

블랙베리는 상대를 자신의 성공 기준으로 쟀다가 놓쳤다. 배터리와 키보드라는 잣대는 정확했지만, 더 이상 소비자의 잣대가 아니었다. 블록버스터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옛 카테고리의 자로 쟀다가 놓쳤다. 매장 경험이라는 기준 안에서 넷플릭스는 언제나 부족해 보였다. 갭은 한 번의 실패 경험 자체를 다음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가, 더 큰 문제를 놓쳤다.

세 브랜드 모두 판단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분야에서 누구보다 유능했다. 블랙베리는 보안과 생산성을 파는 데 유능했고, 블록버스터는 매장 운영을 최적화하는 데 유능했고, 갭은 오랫동안 같은 방식으로 옷을 파는 데 유능했다. 그 유능함을 만든 바로 그 기준이, 새로운 것을 잴 때는 오작동했다. 잘 작동해 온 잣대일수록 바꾸기 어렵고, 오래 검증된 잣대일수록 의심받지 않는다. 그래서 위협은 대개 그 잣대가 잴 수 있는 모양으로 오지 않는다.

이 셋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가 더 보인다. 잣대는 결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것. 배터리와 키보드를 기준으로 삼은 순간 블랙베리는 이미 '무엇이 좋은 스마트폰인가'를 스스로 정의한 것이었다. 매장 경험을 기준으로 삼은 순간 블록버스터는 '무엇이 좋은 콘텐츠 서비스인가'를 스스로 정의한 것이었다. 기준을 정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답의 절반을 정해버린다. 그리고 그 답 안에 없는 가능성은, 아무리 눈앞에 있어도 후보에 오르지 못한다. 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우였다. 실패 한 번을 겪은 뒤로는 아예 다시 재보려는 시도 자체를 줄였다. 잘못 잰 것과, 재기를 그만둔 것 — 둘 다 같은 곳에 도착한다. 다음 신호를 놓치는 곳이다.

익숙한 잣대로 잰 판단은 언제나 그 잣대 안에서만 옳다.
A ruler only measures correctly the things it was made to measure.

잣대를 의심하는 유일한 방법

Questioning the ruler itself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나. 블랙베리도, 블록버스터도, 갭도 사후에 보면 답이 뻔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매 순간이 합리적인 판단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답은 '더 똑똑하게 판단하라'가 아니다. 판단하기 전에, 판단의 도구부터 의심하라는 것이다.

새로운 경쟁자나 새로운 시도를 마주했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 기준으로 얼마나 못 미치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와 다른 기준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가"다. 아이폰은 이메일 기기가 아니었다. 넷플릭스는 비디오 매장이 아니었다. 둘 다 애초에 옛 카테고리의 항목으로 채점될 대상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는 유일한 방법은, 채점표 자체를 내려놓고 다시 만드는 것이다. 익숙한 채점표로는, 아무리 꼼꼼히 채점해도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상대를 알아볼 수 없다.

실무에서 이 질문을 구체화하는 방법 하나는, 경쟁자를 평가할 때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항목부터 점검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배터리, 매장, 로고처럼 우리가 오래 잘해온 항목은 이미 우리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채점표다. 대신 우리가 한 번도 진지하게 재본 적 없는 항목 — 소비자가 이걸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쓰는가 — 부터 물을 때, 익숙한 채점표 밖의 신호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더 곤란한 것은, 이 잣대가 오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조차 같은 잣대로 걸러진다는 점이다. 블랙베리 안에서 "배터리가 짧다"는 지적은 데이터로 뒷받침됐으니 반박하기 어려웠다. 블록버스터 안에서 "매장이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였다. 잣대 자체가 틀렸다는 의심은, 그 잣대로 오랫동안 옳은 답을 내온 조직 안에서는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오작동은 조용히, 정확한 계산의 얼굴을 하고 반복된다.

그러니 다음 경쟁자를 판단할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게 우리보다 나은가"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재고 있는가"다. 배터리로 재면 아이폰은 부족했다. 매장 경험으로 재면 넷플릭스는 부족했다. 로고 하나의 성패로 재면 진짜 문제는 안 보인다. 기준을 의심하지 않는 브랜드에게, 위협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다른 이름의 카테고리가 만들어진 뒤다.

블랙베리와 블록버스터와 갭에게 없었던 것은 정보도, 성실함도 아니었다. 자신의 잣대를 잣대로 인식하는 능력, 그것이 세상을 재는 유일한 도구가 아니라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감각이었다. 그 감각을 잃는 순간 브랜드는 더 이상 세상을 보지 않는다. 세상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것만 본다. 그리고 그 번역 안에서, 다음 위협은 언제나 사소해 보인다.

The threat that doesn't fit your ruler is the one that ends you.